나의 세계와 너의 세계가 만나는 일
사랑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정이다. 그런데 사랑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사랑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고, 그래서 입 안에 감도는 말이다. 그 감미로운 이름을 우리는 혀로 굴리며 갈망하고, 속절없이 아파하다가 또 종국에 희망을 찾는다. 사랑의 의미를 찾기 위해 인간은 평생을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사랑이란 완벽히 끼워 맞추기 어려운 퍼즐이다.
사랑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가와서 꼭 처음 왔던 그대로 사라진다. 사랑이 흩어진 순간엔 고통이 남지만, 새로운 사랑은 마치 '눈을 뜨는' 것 같은 감각으로 찾아온다. 그 눈은 아마 나와 너라는 '우리'의 세계를 향한 눈일 테다. 나의 세계와 너의 세계가 만나는 지점에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그 '공유'가 가진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게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나를, 너를 그리고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든다.
어쨌거나 사랑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문장으로 붙들어둘 수는 있다. 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엔 사랑이 관찰되는 순간을 포착한 문장이 있다. 달콤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날 것의 축축한 문장에도, 사랑이 있다. 마음에서 잘게 부수어 사라진 것만 같았던 사랑이, 여기 남아 있다. 우리는 아마 그 초라하고도 축축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에 한 단계 더 성장해왔을 것이다. 성장할 것이다. 그 고통이 우리를 한층 풍요로운 삶으로 이끈다는 말을 믿는다. 사랑은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든다.
수집한 문장을 적어본다.
사랑의 문장들
- 도대체 어떤 구조 속에서 A는 B에게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되는가. 그리고 어떤 조건이 갖춰질 때 B는 A에게 “나도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되는가. 이 두 물음 중에서 더 흥미로운 것은 후자다. 왜냐하면 내가 어쩌다 너를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라는 물음은, 내가 너와 ‘이미’ 사랑에 빠진 이후에 던져지는 한에서는, 물음으로서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진정 놀라운 것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일이 아니라, 그 누군가가 나의 사랑에 응답하게 되는 일이다.그런데 그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상상하되, 그가 그 사랑에 어떤 원인도 제공한 바가 없다고 믿는 경우, 그는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그 누군가를 사랑할 것이다. - 에티카
- 그러므로 어떤 사랑의 논리학도 결과를 확언할 수 있는 정도로까지 정교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우연을 다 통제할 수는 없으므로.
- 영화가 일려주듯이 인간의 손가락뼈는 몸의 다른 뼈와는 달리 절대 회복되지 않는다. 그의 손은 앞으로도 계속 그에게 통증을 느끼게 할 것이고, 더 거대한 결여의 가능성을 상기하게 할 것이고, 스테파니에게 매번 다시 응답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결여를 깨달을 때의 그 절박함으로 누군가를 부른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말, ‘나도 너를 사랑해’라는 말의 속뜻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결여다.’
-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훌륭한 작가들은 정확한 문장을 쓴다. 문법적으로 틀린 데가 없는 문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는 문장을 말한다. 그러나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100퍼센트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문학은 언제나 ‘근사치’로만 존재하는 것이리라.
- 삶에 희망이 있다는 말은, 앞으로는 좋을 일만 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지난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델의 첫사랑이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고통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면 절망이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아델의 고통은 그녀를 달리 살게 할 것이고 더 사랑하게 할 것이다.
- 한 사람은 덜 사랑했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다른 한 사람은 너무 사랑했다.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둘은 노력했다. 엄마는 아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는 척했고, 아들은 엄마를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척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파국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둘 모두를 기소하는 데 실패한다.
- “자연은 실로 모욕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암시하고 경고한다.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이빨을 뽑아놓고, 머리카락을 뭉텅뭉텅 뜯어놓고, 시력을 훔치고, 얼굴을 추악한 가면으로 바꿔놓고, 요컨대 온갖 모멸을 다 가한다. 게다가 좋은 용모를 유지하고자 하는 열망을 없애주지도 않고, 우리 주변에서 계속 눈부시게 아름다운 새로운 형상들을 빚어냄으로써 우리의 고통을 한층 격화시킨다.” (데이비드 실즈,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문학동네, 2010, 209~210쪽에서 재인용)
- 사랑에 대한 대개의 정의는 시도되는 순간 실패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사랑은 전칭명제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매번 개별적인 사례로 존재한다. 그래서 ‘사랑은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다만 ‘무엇도 사랑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 1600년대 초반에 셰익스피어는 자기가 누구인지 잘 몰라서 비참해진 자들의 이야기를 쓰고 주인공의 이름을 작품의 제목으로 삼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름이라는 것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나의 존재에 그 어떤 확실성도 부여해주지 않는다.
선희의 ‘실체’라는 것이 과연 있는지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그녀 자신도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나는 존재할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라는 물음을 뒤에 거느리고 있다는 것이고, 여기서 다시 몇 겹의 막을 걷어내고 나면 애초의 물음은 사실상 ‘나는 타인이 욕망할 만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의 변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선희만의 물음이 아니다. 언제나 이것보다 더 절실한 물음이 우리에게 있었던가.
- 선희가 내가 누구인지를 물을 때 그녀가 타인의 인정(욕망)을 은밀히 바라듯이, 선희에게 그녀가 누구인지 말하는 남자들 또한 그녀의 인정(욕망)을 은밀히 바란다. 같은 욕망이 말을 끌고 가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다른 사내의 그것을 복제하면서 결국 비슷해지고, 선희가 어떤 여자인가 하는 물음 따위는 어느새 무의미해져버린다.
- 인간은 자신이 잉태되는 성스러운 순간에 참여할 수 없고, 죽은 뒤의 세상에 미리 입회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들이 주는 불안을 견뎌내기 위해 이야기라는 것을 만들어왔다고 했던가.
-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쉽게 ‘유죄추정의 원칙’에 몸을 싣는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라는 속담은 유죄추정의 원칙이 대체로 옳다고 우리를 오도한다는 점에서 혐오스럽다.
...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 얼마간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잊고 싶은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잊고 싶은 일’이라는 것이 미처 정산이 끝나지 않은 채로 버려진 진실이라면 그것은 언젠가는 다시 되돌아와서 계산을 끝내려 든다. 그것은 두려운 일이다. 소위 ‘억압된 것의 귀환’이다.
- 서사는 사건을 다룬다. 당연해 보이는 말이지만 이 세상의 모든 영화들이 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건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을 겪은 주인공이 그 일이 있기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을 때에만 그 일은 사건이다. 내가 어딘가에 쓴 문장을 변용해서 말하자면, 사건은, 내가 결코 되찾을 수 없을 것을 앗아가거나 끝내 돌려줄 수 없을 것을 놓고 간다.
- 그 은유를 이렇게 정리하려고 한다. ‘성장은 살인이다.’ 우리는 성인이 되기까지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을 먹어치우고, 그것으로 내 안의 타자를 일깨운 다음,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그들을 (실제적으로건 심리적으로건) 떠난다. 그렇게 우리는 인생의 몇몇 고비들을 특정한 어떤 사람을 상징적으로 살해하면서 통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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