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記錄 : 일상의 소소한

내가 일기를 쓰는 이유

by 지구인숙 2023. 10. 19.

# 손바닥만한 일기장에 적힌 문장을 모아봤다. 기쁘고 슬펐던 모든 날에 사랑이 숨어 있었다. 쭉 밝은 날만 이어졌으면 싶지만서도 슬퍼서, 슬픔이 있어서 기쁨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모든 날이 예쁘게 보였다. 위로가 되어준 나의 기록들.


나를 만든 문장들

 
- 이제껏 나는 음악이 가진, 어떤 순간을 환기하는 힘에 붙들려 음악을 찾아 들었다. 그런데 음악을 그 자체로 만끽하면서 보낸 시간은 도리어 그 음악에 대한 기억을 새로 쓰게 한다. 나에게 검정치마가, 스티비 원더가 어느 겨울의 끝자락으로 기억된다면 그건 순전히 어제 오늘의 충만한 새벽과 아침 때문일거다.
 
-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누군가와 소통하는 데 있어 언어적 표현만 그 수단이 되는 건 아니니까. 이날 새벽 나는 비언어가 주는 울림에 한번, 음악이 가진 힘에 두번 놀랐고 내내 감동했다.

꽤나 게으른 내가 무슨 힘이 났는지 빨래도 척척 널고 한달음에 달려가다니. 천천히 고른 음악을 듣고, 어쩔땐 공기처럼 음악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상태에서 깊이 집중하기도 하고. 가사를 곱씹으면서 음악을, 마음을, 생각을, 고백을 소화시키던 시간이 더없이 행복했다.

누군가와 모든 것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은 어떤걸까. 하루종일 그 말 한마디에 힘껏 가까워졌다가 멀찍이 떨어져봤다가를 반복했다. 고장이 났다.
 

블루먼데이에는 특이한 향의 맥주도 많다

 
- 블루먼데이를 사랑하게 될 것 같아. 음악이 흐르고 술과 낭만이 있는 곳. 긴, 파마머리의 사장님이 계신 낯설고도 익숙하던 공간. 작은 종이에 빼곡하게 적은 신청곡이 탁 하고 터져나올 때의 전율이 환상적이었고 그 옆에서 음악을 흥얼거리는 사람들도 사랑스러웠다. 술에 취해서 자리에 엎드려 문장을 적어나가는데 내가 지금 무슨 문장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사랑을 계속해서 고백했다.

내방 구석에 처박혀있던 언제 샀는지도 모를 노트가 이만큼 소중해질 줄은 몰랐지.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을 낯선 사람들과 나눠 듣던, 그런데 나는 그 순간 그 음악이 둘 사이에만 흐르는 것만 같았던 그런 낭만적인 밤.
 
- 흔히 사랑하는 사람과 코드가 잘 맞아야 한다고들 한다. 그 코드는 식성으로, 웃는 순간으로, 취미로, 민초 - 반민초로 양태를 달리하는데 나는 사람이 우는 순간이 그중 제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겪은 일이 아님에도 울 수 있는 감각이. 눈물을 흘린다는 건 어쩌면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큰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기뻐도 눈물이 나고 너무 슬퍼도 눈물이 나고. 너무 화가 나서 눈문을 흘리기도 하고. 공허함을 참을 수 없을 때도 눈물을 짓는다.

나는 타인의 삶에 힘껏 공감하는 사람이 좋다.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을 꿰찬 노부부의 삶을 상상하면서 노인의 슬픔을 나의 것으로 품을 수 있는 사람이 좋다. 함께 울 수 있다는 건 앞으로 상대와 나눌 감정의 결과 깊이가 비슷하다는, 또 우리가 맞닥뜨릴 위기와 우여곡절을 건강하게 소화해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언젠가 상대가 아주 큰 기쁨이나 큰 절망을 만날 때 같은 마음으로 상대를 위해 가장 마지막까지 울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 갈치조림을 먹었다. 이제껏 아빠가 그래왔던 것처럼 생선 가시를 발랐다. 나는 가시 바르는 일이 무척 귀찮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사랑이었구나. 오늘에서야 아빠를 조금 이해한 것 같다. 생선 가시를 조금 더 잘 바르고 싶다. 젓가락질이 더 능숙해질때면 나는 더 큰 사랑을 하고 있을텐데!
 
- 친구를 만났다. 얼마전에 사랑을 시작했는데 아직 못다 쏟은 마음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얼결에 이별을 했단다. 시간이 그렇게 더디지 않게 지나서 친구 마음이 잘 아물었으면 좋겠다.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마음을 열었을텐데 사랑에 크게 상처받은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사랑은 강렬하고 그래서 가끔 더 아픈가보다.
 
-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감사하면서도 무서운 일이다. 적당히 주고, 적당히 아프고 적당히 기대는 법을 누가 알려줬으면 좋겠다. 나는 그냥 태어났는데,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건지 배워본 적이 없는데, 꽤 괜찮은 사람으로, 누구에게 상처주기 않고 또 밖에서 큰 상처 받지 않으면서 사는 건 어려운 일이다. 모두가 살면서 아픈 경험을 할텐데. 사람을 믿기에도, 믿지 않기에도 참 외롭고 슬픈 기분이 든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남을까. 나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영영 자유로운 나로 남기 위해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도무지 모르겠다. 슬픔이 계속돼도 눈 앞의 할 일은 자비롭지 않지! 마음껏 울 수도 없는 지옥의 수요일. 
 
- 마음을 적는 일은 언제쯤 수월해질까? 보이지 않는 것들을 관찰하고 단어로 붙들어두기까지 별보다도 많은 생각들과 마주한다.
 
- 연필을 새로 깎았다. 잠깐의 정체가 있더라도 다시 쓰면 그 기록이 언젠가 윤슬같이 반짝이는 때가 온다는 걸 안다. 마음은 고요하다. 소란을 걷어내니 적막도 외롭지 않다. 충만하고 또 충만하다. 역시 시간이 유일한 방법이었는지도.

소망하는 일이 있다는 건 내가 삶에 그만한 애정을 두고 있다는 걸 알려준다. 삶은 때때로 불안정하지만 모든 것이 반듯하다고만 해서 아름답지 않듯, 적당한 슬픔은 새롭게 나아갈 동력을 쥐어 준다. 나아갈 곳이 있다니 참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