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작가의 세계를 애정한다.
무척 깊이.
날이 추워지면 생각나는 작품, '디디의 우산'
지난해 디디를 읽으며 적어내려간 메모를 다시 꺼내 읽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물음이 많다.

문장, 그리고 물음
- dd를 만난 이후로는 dd가 d의 신성한 것이 되었다. dd는 d에게 계속되어야 하는 말, 처음 만나 상태 그대로, 온전해야 하는 몸이었다. d는 dd를 만나 자신의 노동이 신성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을 가진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으며,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여길 수 있는 마음으로도 인간은 서글퍼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d를 이따금 성가시게 했던 세계의 잡음들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행복해지자고 d는 생각했다.
- 더 행복해지자. 그들이 공유하는 생활의 부족함, 남루함, 고단함, 그럼에도 주고받을 수 있는 미소, 공감할 수 있는 유머와 슬픔, 서로의 뼈마디를 감각할 수 있는 손깍지, 쓰다듬을 수 있는 따뜻한 뒤통수…… 어깨를 주무르고, 작고 평범한 색을 띠고 있는 귀를 손으로 감싸고, 따뜻한 목에 입술을 대고, 추운 날엔 외투를 입는 것을 서로 거들며, dd의 행복과 더불어, 행복해지자.
d는 dd를 만나 사랑의 신성함을 느꼈다. 그 신성함은 사랑에 빠진 찰나에 포착된 것이었다. 사랑에 빠진 순간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가장 용감했을 때의 나는, 가장 작아보였던 때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나.
사랑은 나를, 당신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었나.
-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인간의 마음은 턱에 있다고 d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턱이 아팠으니까.
dd를 잃은 d에겐 입을 꽉 다무는 습관이 생겼다. 얼마나 세게 다물었는지 ‘육체는 희박해지고 사물처럼 턱이 남았는데, 그런 것 같은 때가 있었는데’라고 표현할 정도로. 사람의 마음은 눈으로 볼 순 없지만, 물리적으로 마음이 존재한다면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마음을 어떻게 감각할 수 있을까.
- d는 턴테이블에 LP를 올렸다. 최초의 잡음이 들리자마자 눈을 감았다. 이제 음악이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바늘이 갉작거리며 홈을 따라 나아갔다. 음악이 시작되었다.
…(중략) 음악뿐이었다. 15번 방의 창 없는 구조는 성능 좋은 소리상자처럼 음악을 담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침대, 그 위에 깔린 변색된 담요, d의 백팩과 점퍼를 걸쳐둔 의자, 근육통이 있는 몸. 그 방에 있는 모든 것이 음악에 공명하여 파장을 발산하고 있었고 그 파장들은 모든 벽에 부딪혀 반향이 되었다. 그게 모두 음악 속에서 음악이 되었다.
d는 dd의 방에서 오래된 LP를 가지고 왔다. 고르지 않았던 dd의 취향. 취향이 되기 전에 중단된 취향은 d의 방에서 음악이 됐다. 아마도 음악에는 어떤 순간을 환기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나의, 특별한 기억이 얽힌 음악이 있었던가. 그 음악을 어떤 상황 어떤 공간에서 들었던가.
- 그런데 그것을 아시나요? 이웅평 대위가 전투기를 몰고 남한으로 넘어온 이유가 환멸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중략) 그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가 부러웠습니다. 두 손으로 조종간을 붙들고 목적지를 향해 전투기를 몰아갔을 그 새끼가 너무 부럽다.
…(중략) 그는 분명히 환멸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그는 그것을 가지게 된 거죠. 탈출의 경험을.
내게는 그것이 없어.
나는 내 환멸로부터 탈출하여 향해 갈 곳도 없는데요.
환멸이란 감정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꿈이나 기대나 환상이 깨어짐. 또는 그때 느끼는 괴롭고도 속절없는 마음’ 되풀이되는 대형 참사를 보면서 환멸을 자주 느낀다. 행정의 부재에, 나의 무력함에.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 환멸을 느낄까.
환멸에 사로잡히지 않게 위해선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까. 탈출구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 열세번째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그것을 완성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다정, 그것이 내게 좋은 툴이 될 수 있을까. 툴을 쥔 인간은 툴의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한다고 내게 말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툴을 쥔 인간은 툴의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한다. 돈, 언어, 스마트폰...
사람들은 누구나 저마다의 ‘툴’을 쥐고 살아간다고 한다. 나는 어떤 툴을 가지고 있을까. 그 툴은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나. 툴을 가져본 적은 있었나. 내가 꼭 가지고 싶은 인생의 툴은 어떤 양태를 하고 있을까.
- 살면서 부끄러운 일을 꼽으라면 이제는 제일 먼저 그 일이 생각난다. 나 언니 돈 떼먹은 것도 별로 부끄럽지 않은데, 부끄러워. 내가 내 입으로 그 애들에게 “꺼져”라고 말한 순간이. 그래서 언니 나는 내가 지금 어른 같다. 지금 내가 어른이라는 걸 나는 알아.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의 김소리는 과거 서점에서 아르바이트 하던 때의 일을 이야기한다. 과거 본인이 존경하던 ‘스물 한 살 지혜언니’의 모습이 스물아홉 김소리에게 나타난 날의 일을.
일터에서 유능했던 배지혜의 방식은 이랬다. 구매하지 않은 만화책을 뜯어버린 아이들에게 “꺼져”라고 말하기. 배지혜의 싸늘함은 분명 어린 날의 김소리에게 어른스러움으로 느껴졌을 거다. 크고 작은 갈등 상황 속에서 감정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는 대응 방법이었으니. 다만 지금의 김소리가 생각하는 어른스러움과 거리가 있을 뿐.
진정한 어른의 조건은 무엇일까. 어른이 되는 계기가 따로 있을까.
- ‘상식적으로’에서 상식은 본래의 상식, 즉 사유의 한 양식이라기보다는 그 사유의 무능에 가깝지 않을까. ... 우리는 그것을 말할 필요가 없었다.
묵자의 상태가 상식이라서 그걸 부를 필요도 없어, 그것이 너무 당연해 우리는 그것을 지칭조차 하지 않는다.
... 전광판에 안내되는 ‘지평’이라는 묵자를 볼 수 없는 사람은 지금 들어온다는 그 열차가 지평행 전철인지 춘천행 ITX 열차인지를 알 길이 없었다.
... 보는 이는 보지 못하는 이를 보지 못한다. 보지 못하는 이가 왜 거기 있는가? 그는 고려되지 않는다. 용산역 1번 플랫폼의 상식에 그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는 거기 없다. 나는 아직 그것을 볼 수 있었으므로 거기 있었지만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상식의 세계라는 묵자의 플랫폼에서, 다시 한번.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라는 제목을 지은 이유겠지. 아마도.
작품의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흔하게 말하는 상식, 그것은 사유라기보다는 굳은 믿음에 가깝고 몸에 밴 습관에 가깝지 않을까’, 상식이 배제해버린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우리가 상식이라 말하는 믿음은 어떤 사람들을 지우고 있었나. 그들 삶의 어떤 부분들을 빼앗아갔나. 어떤 상식은 '약함에 대한 혐오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도 했다.
꽤 많은 상식들이 그랬다.
- 산다는 것은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문장들로부터 삶의 형태들을 받는 것...... 저 문장을 빌려 말하자면 우리는 지난 계절 내내 새로운 문장을 써왔고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제 그 문장은 완성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그날일까. 혁명이 이루어진 날.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혁명은 마침내 도래한 것일까.
2017년 3월 10일, 제18대 대통령 박근혜가 헌법재판소 재판관 전원의 찬성으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됐다. 2016년 내내 이어지던 촛불이 가져온 결과였다. 작가는 묻는다. 과연 ‘혁명’이 정말 도래한 거냐고.
광화문에 모였던 시민들의 바람은 이루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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