靈感 : 감상을 씁니다

[유시민,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앎에 관하여

지구인숙 2023. 10. 14. 13:24

앎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 : 거만과 겸허
 

소설가 조해진은 <빛의 호위>에 이런 문장을 썼다. ‘말이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어떤 말은 마음을 만들기도 한다.’ 이 문장은 이렇게도 바꿀 수 있다. ‘어떤 말은 관점을 만들기도 한다.’ 과학이란 말의 힘은 그야말로 위력적이다. 과학은 세계를 탐구하는 여러 방법 중에서도 소위 진리 탐구에 가장 근접한 방법론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주장에 과학이란 이름이 일단 붙고 나면 신뢰할만한 근거로써 우위를 점하게 된다. 단순히 그럴법한 이야기가 아니란 이야기다. 우위를 차지하지 못한 쪽의 처지는 어떻게 되나. 반대편의 주장엔 ‘비과학’ 딱지가 붙어 주장의 기반 자체가 무너진다. 우스갯말로 선 과학 필승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사태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 사회는 종종 과학의 언어를 오독하는 경향이 있다고. 
 
유시민 작가의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는 과학이 우리 주변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열쇠임을 알려준다.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 인문학에서 찾을 수 없던 답을 과학에서 찾았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 해석이 과학 만능주의로 흐르는 건 아니다. 과학과 인문학의 효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과학적 지식에 인문학적 주석을 단 해설서다. 뇌과학과 생물학, 화학, 물리학 그리고 수학에 이르는 전개로 어렵지 않게 과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과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기반을 이루고, 인간을 비롯한 생물종의 존재 원인과 온갖 자연 현상,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벌어진 사건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도구다. 대부분의 문과 학생처럼 나도 수학을 일찍이 놓았다. 생명과학과 지구과학처럼 '외울 수 있는' 과학엔 곧잘 흥미를 붙였지만 물리학과 화학은 수학과 별반 다르지 않은 취급을 받았다.

오래도록 복잡하고 지루한, 골치 아픈 학문이라 여기던 과학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저자가 영향을 받은 최재천 교수와 김상욱 교수의 덕이기도 하다. (요즘 최재천 교수의 유튜브 채널 '최재천의 아마존'과 김상욱 교수가 출연한 프로그램에 푹 빠졌다)
 
앎의 즐거움을 이제야 알게 된 지도 모른다. 모순적이게도 교실과 강의실에서 벗어난 이제서야, 나는 알아가는 과정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시험이 없어서일까. 모르는 문제와 마주할 긴장은 더 이상 감돌지 않지만 그래도 꾸준히 새로운 분야를 알아가고 싶다.

앎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가 있다고 한다. 거만과 겸허. 고대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가 했다고 전해지는 질문을 우리는 안다. '너 자신을 알라', 이 설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상관 없다. 나는 내가 모르는 걸 분명히 알고, 무지를 앎으로 채워가고 싶다. 그 과정의 즐거움을 놓고 싶지 않다.
 


 

문장들
 

- 인문학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는 욕망의 산물이다. 그 욕망을 충족하려면 누구나 무에서 시작해야 한다. 단 하나의 인문학 지식도 유전으로 물려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뇌가 생물학적으로 진화해 자신을 이해하려는 욕망을 버리지 않는 한, 인문학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인문학의 위기는 질문을 제때 수정하지 못한 데서 싹텄는지도 모른다. 내가 무엇인지 모르는데 누구인지 어찌 알겠는가? 우리가 무엇인지 모르는데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알아낼 것인가?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본성을 무슨 수로 밝히겠는가? 인간이 무엇인지 탐구하지 않으면서 사회를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 '거만한 바보'는 단순한 바보가 아니다. 권력을 장악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악행을 저지른다. 문명의 역사는 세속권력이나 종교권력을 거머쥔 '거만한 바보'들이 자연과 인간에 관한 사실을 탐구하고 밝혀낸 과학자를 가두고 고문하고 죽이고 책을 불태운 사건으로 얼룩졌다. 과학자는 '거만한 바보'들에게 화를 낼 권리가 있다. 
 
- 우리의 감각으로 우리의 공간에 특권을 부여한 천동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 권위와 로마 교황정의 권력을 등에 업고 진리인 양 군림했다. 
 
-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지구를 포함한 행성들이 자전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면서 태양 주변을 돈다는 사실을 논증함으로써 인간이 지구에 부여한 부당한 특권을 받탈했다.
 
- 다윈은 인간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를 신화에서 과학을 바꾸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허울을 벗고 지구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 호모 사피엔스가 되었다.
 
- 과학혁명은 생산기술을 혁신함으로써 생산조직의 형태와 운영방식, 대중의 생홟방식, 정치제도와 법률, 사회적 계급의 성격, 국가의 기능, 가족제도와 문화양식까지 세상 모든 것을 바꾸었다. 그런 변화의 원인을 찾고 양상을 분석하며 미래를 전망하는 것이 인문학의 과제다. 
 
- 케플러와 갈릴레이를 비롯해 과학혁명 여명기의 과학자들은 너나없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과 싸워야 했다. 진리가 아닌 견해를 말했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 권위 때문에 너무 오래 틀린 주장이 진리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 뇌에 깃든 우리의 자아는 단단하지 않다. 쉼 없이 흔들리고 부서지고 비틀리는 가운데 스스로를 교정하고 보강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견딘다. 자유의지는 그런 자아가 지닌 것이다. 자아가 불안정한데 자유의지가 어찌 강고하겠는가. 모든 전향을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으로 본다면 자아를 과대 평가하는 것이다. 자아는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보다는 뇌의 물리적 변화나 호르몬 분비의 불균형 때문에 달라질 가능성이 더 높다. 
 
- 다시 강조한다. 우리의 자아는 단단하지 않다. 지진으로 흔들리는 땅 위에서 해일과 폭풍우를 맞으며 서 있다. 흔들리고 부서지고 퇴락해 사라질 운명이다. 자유의지는 그런 곳에 기거한다. 있다고 말하기엔 약하고 없다고 하기엔 귀하다. 
 
- 나만 그런 게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도 마찬가지다. 사랑하기엔 흉하고 절멸하기에는 아깝다. 그 운명이 어찌 될지 나는 알지 못하고 책임질 수도 없다. 단지 나 자신의 삶 하나를 스스로 결정하려고 애쓸 따름이다. 악과 누추함을 되도록 멀리하고 선과 아름다움에 다가서려 노력하면서, 내게 남은 길지 않은 시간을 살아내자. 이것이 내가 뇌과학에서 얻은 인문학적 결론이다. 
 
- 모든 생물의 DNA가 같은 언어로 씌어 있다는 게 뭐 그리 감동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왜 아닌지 되묻고 싶다. 나는 그 사실을 안 뒤로 '존재의 고독'을 덜 느낀다. 
 
-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고 해서 속상해할 이유가 뭐 있는가. 사실은 도덕이 아니다. 가치도 아니다. 그저 사실일 뿐이다. 
 
-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인문학이 준 이 질문에 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생물학을 들여다보고서야 뻔한 답이 있는데도 모르고 살았음을 알았다. '우리의 삶에 주어진 의미는 없다.'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찾지 못한다. 남한테 찾아 달라고 할 수도 없다. 삶의 의미는 각자 만들어야 한다. 
 
- 신이 인간을 창조했는가? 아니다.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 인간은 왜 신을 창조했는가? 삶의 유한성을 넘어서려는 욕망을 채우고 싶어서였다. 그렇다면 종교는 무엇인가? 종교는 믿는 자에게 진리이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망상이며 권력자에게는 유용한 통치도구다. 문과는 보통 이런 식으로 묻고 답한다. 
 
- 인간은 분명 유전적 우연과 환경적 필연이 작용한 자연선택의 산물이고, 문명은 우리 종이 진화를 통해 획득한 본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의 힘으로 본능을 어느 정도는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지만 본성 그 자체를 역사의 시간에 바꾸지는 못한다. 
 
- 자연선택은 보편적인 친족 이타주의를 진화시켰는데 우리의 뇌는 적응의 이익과 무관하게 그것을 확장했다. 자신의 존재를 고귀하고 아름답게 만든다는 믿음 때문에 친족 아닌 타인에 대해서도 이타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움과 고귀함은 물질의 특성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물질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믿으며, 그런 믿음을 표현하려고 때로는 목숨까지도 건다. 이타주의도 그런 것 중 하나일 수 있다. 
 
-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지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 기후위기와 핵폭탄에서 우리 자신을 구하려면 인류 전체가 협력해야 하는데, 호모 사피엔스가 그 일을 해낼 것이라고 확신할 근거가 없다. 그래도 무언가 하긴 해야 한다. 우리 자신 말고는 누구도 우리를 구할 수 없으니까.
 
- 우주에서는 모든 일을 원자핵이 하고 전자는 존재감이 전혀 없다는 걸 알지만, 나는 전자가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지구인이니까.
 
- 탄소 원자 하나가 다른 탄소 원자 4개와 결합해 3차원 구조를 만들면 다이아몬드가 된다. 
... 사람들은 그 단단함과 영롱함에 영원한 사랑에 대한 소망을 투사했다. 똑같은 탄소인데도 결혼 예물이 된 다이아몬드가 부여받은 임무를 제대로 수행했다는 증거는 없다. 남자가 보유한 권력과 재산의 크기를 증명하는 수단으로는 훌륭했지만 그 영롱함으로 사랑의 환희를 북돋은 건 짧은 순간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책임은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사랑을 빛바래게 만든 시간에게 물어야 한다. 
 
-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살피다가 별의 생애를 알았다. 별도 태어나고 죽는다. 저마다 주어진 시간이 있다. 절정기에는 스스로 제어하지 못할 에너지를 내뿜는다. 짧고 장렬하게 최후를 맞기도 하지만 생애의 마지막이 길고 초라한 경우도 있다. 사람과 닮았다.
 
- 모든 것은 한 점에서 출발했다.
 
- 자연의 사실에 부합하는 원리를 가진 철학이라고 해서 진리인 건 아니다. 자신들이 만든 청사진대로 사회를 개조하려고 행사하는 폭력을 그 철학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건 더욱 아니다. 
 
- 인문학의 임무는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유용한 담론을 생산하는 것이다.
 
- 엔트로피 법칙에 따르면 죽어 없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다. 모든 사람, 모든 생물이 그렇다. 지구와 태양, 별과 은하, 우주 전체도 같은 운명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영원성에 대한 갈망은 어떤 수단으로도 충족하지 못한다. 
 
- 주기적으로 팽창, 수축하는 우주에서는 어떤 정보도 다음 주기로 흘러가지 않는다. 우리 우주의 은하 별 행성 생물 문명은 새로운 우주가 태어나는 대폭발의 특이점을 넘지 못한다. 신이 우주의 태엽을 다시 감는다고 해도 우리 우주에 구원은 없다.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의 묵시록이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 
 
- 인간은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영원한 그 무엇을 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