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혼돈과 질서 사이
문장들
- 철학에는 어떤 것들이 이름을 얻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상이 있다. 이 사상은 정의, 향수, 무한, 사랑, 죄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이 천상의 에테르적 차원에 머물면서 인간이 발견해줄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가 그것들의 이름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본다.
… 그런데 이 사상에 따르면, 이름이 존재하기 전까지 개념들은 대체로 불활성 상태에 있다고 한다.
- 아고노말루스 요르다니. 그러면 단지 그 행위만으로 새로운 종이 탄생했다. 미지의 생물에게 자신의 깃발을 꽂기 위해 그는 주석 이름표에 그 성스러운 이름을 펀치로 새기고, 그 이름표를 유리단지 속 표본 곁에 담그고 뚜껑을 닫았다. 우주의 또 한 귀퉁이가 포획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마치 전리품처럼 높이, 더 높이 쌓아가며 전시했다. 그가 질서 속으로 끌어다놓은 혼돈의 양이 거의 건물 두 층 높이로 올라갈 때까지.
- 평범한 한 남자가 자기 자신에게 그토록 희망차고, 그토록 용감하며, 그토록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는 모습을 보여준 일은 그전엔 결코 없었다. 왜냐하면 결국 살아남는 것은 사람이고,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도 사람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으며 불에 타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그 지진과 화재가 준 교훈이다. 그가 지은 집은 무너지기 쉬운 카드로 지은 집이지만, 그는 집 밖에 서 있고 다시 집을 지을 수 있다.
- 나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 대한 나의 괴상한 애착과, 그가 내게 살아가는 방법을, 내가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내 인생을 되돌려놓을 방법을 가르쳐줄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관해 골똘히 생각했다. 그에게는 내가 존경할 만한 많은 면들이 있었다. 그의 냉소. “숨어 있는 보잘것 없는” 꽃들에 대한 그의 몰두. 내 아버지의 쇠솔로 된 밀대 빗자루를 연상시키는 그의 우스꽝스러운 팔자수염. 그의 강철 같은 근성. 그 어떤 불운이 자기 앞에 닥쳐와도 주저앉기를 거부하던 그 투지 넘치는 결연함.
- 동물은 인간이 스스로 우월하다고 가정하는 거의 모든 기준에서 인간보다 더 우수할 수 있다. 까마귀는 우리보다 기억력이 좋고, 침팬지는 우리보다 패턴 인식 능력이 뛰어나며, 개미는 부상당한 동료를 구출하고, 주혈흡충은 우리보다 일부일처제 비율이 더 높다.
-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을 실제로 검토해볼 때, 인간을 꼭대기에 두는 단 하나의 계층구조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상당히 무리해서 곡예를 해야 한다.
… 심지어 우리는 지구에 가장 새롭게 나타난 생물도 아니다.
- 그것은 지독히도 방향 감각을 앗아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혼돈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 내가 어려서부터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무던히고 애써왔던 바로 그 세계관이었을 것이다.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개미들과 별들과 함께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떨어져 내리는 느낌. 소용돌이치는 혼돈의 내부에서 바라본, 차마 마주 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시고 가차 없고 뚜렷한 진실.
… 그 사다리가 데이비드에게 준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의 해독제.
- 애나는 웃음과 온기가 가득한 활기찬 가정을 꾸리길 원했다. 애나는 자기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애나를 잡아 가둔 사람들 역시 어느 정도는 분명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수용소에서 애나가 하던 일이 수용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애나는 아이들을 목욕시키고 노래를 불러주고 파자마를 갈아 입혀주고 흔들어서 재워주었다. 나라의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는 적합하지만, 자신의 아이를 돌보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일까.
- 나는 애나의 배에 불거진 흉터에 대해 생각했다. 자기 몸을 내려다볼 때 대법원이 인정한 무가치함의 스탬프가 보이는 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보랏빛 리본 같은 그 흉터가 사실은 하나의 선물로 의도된 것임을, 아마도 그들이 원한 방식이었을,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생을 끝까지 살도록 허용해주는 국가의 자비였음을 아는 건 어떤 느낌일까.
- 천천히 그것이 초점 속으로 들어왔다. 서로서로 가라앉지 않도록 띄워주는 이 사람들의 작은 그물망이, 이 모든 작은 주고받음-다정하게 흔들어주는 손, 연필로 그린 스케치, 나일론 실에 꿴 플라스틱 구슬들-이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그물망이 받쳐주는 사람들에게는 어떨까? 그것은 모든 것일 수 있고, 그들을 지구라는 이 행성에 단단히 붙잡아두는 힘 자체일 수도 있다.
- 내가 세계를 이런 식으로 보는 데 익숙하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나의 확실성을-그러니까 나의 테디베어를-꼭 붙잡고 있고, 원망은 늘 그대로 남아 있으며, 나의 두려움은 늘 빵빵하게 차 있고, 지구는 납작하다. 하지만 그러다가 나는, 이를테면 인체에서 “사이질”이라는 새로운 기관이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읽는다. 늘 거기 있었지만 어째선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놓치고 있었던 것. 그러면 세계는 조금 더 벌어지며 열린다. 그리고 나도 다윈이 했던 것처럼 해야 한다는 것을 되새긴다.
끄적끄적
룰루 밀러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통해 구원받았을까.
구원하지는 못한 것 같다.
다만 206쪽의 문장, '아마도 그 믿음이 그에게 진실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주었기 때문일 것', '현기증 나는 그의 인생을 휘몰아가는 소용돌이치는 늪을 깔끔하고 빛나는 질서로 바꾸는 방법이었다'에서 낙관을 봤다.어떤 부분에선 완고하고 잔인했던 일관성이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게 어떤 구원이 되었는지를 생각하면서, 또 저자가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동안 발견한 흔적들이 새로운 힘을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해서다.
저자가 갈망하던 믿음이, 어떤 삶에서(비록 정당성을 의심하더라도) 하나의 삶을 지탱해주는, 그러한 믿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 하나라도 얻었다는 점이 내겐 낙관이고 희망이었다.
그러니 저자는 '탈출하려고 그토록 애써온 지구로 다시 돌아왔'고, '더이상 나 자신을 속이지 않'겠다고 다짐한 게 아닐까? 황량한 지구에 발을 딛은 사람은 차분히 혼돈을 직시할 줄 안다. 설령 그 진실이 '차마 마주볼 수 없을만큼 눈부시고 가차 없고 뚜렷'하더라도.
'혼돈'과 '질서'는 무엇을 의미하나.
저자 개인을 놓고 볼때 혼돈과 질서는 각각 이별, 그리고 사랑을 내포하는 것처럼 보인다. 룰루 밀러의 삶에 질서를 만들어낸 것은 '사랑'이었다. 오랜 기간 쌓아온 안식처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위로받고, 밤을 보내고. 그 관계를 이어오는 것, 감정을 나누는 일, 일련의 과정이 저자 삶의 질서였을 것이다.
난 이 대목에서 혼돈과 질서는 미와 추, 선과 악의 관계와 같은 선상에 놓인 개념이란 생각을 했다. 어디에선가 읽어 어렴풋이 기억나는 문장을 빌려오자면, (혼돈과 질서는) 개별 개념이 가지는 특수한 성격을, 근원적으로 발현 가능한, 그러나 동시에 열등한 다른 개념과의 비교를 통해 존립할 수 있는 개념인 것이다. 말하자면 지극히 상대적이면서 상호 의존적이다.
어느날 저자가 갑작스레 마주한 이별은 혼돈이었다. 그가 맞닥뜨린 혼돈은 그 둘을 '집어삼'켰다. 언제 일어나느냐 하는 시기의 문제를 저자는 거스르지 못했다. 이윽고 그는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는 분류학자에게 빠진다. 밀러가 헤어나오지 못한 혼돈을 의연히 다루어낸 학자에게 매력을 느껴서다.
그런데,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게 찾아온 혼돈은 어떤 의미에서 혼돈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이름이, 수많은 이름이 상실된 상태에서 그는 이름표와 비늘을 찾아 연결했고, 가는 실 하나로 혼돈은 그리 큰 혼란이 아니게 됐다.
어쩌면 의외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혼돈(으로 비춰지는 상황) 속에서 의연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이름을 붙여 분류하려던 행위, 그로서는 절대적이고 신성한 질서 아래 구축된 세계라 생각한 학문이 사실은 회색지대에 놓인, 불확실한 영역의 업이라는 걸 그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고기 하나 하나에 고유한 이름을 붙이는 일과, 이를 통해 어떤 절대적인 규칙을 세우는 일이 연장선 위에 놓인 것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내가 읽은 질서와 혼돈은 이렇다. 삶의 체계와 양식을 구축하는 게 질서라면, 그 세계를 흩어놓는 힘은 혼돈이라고. 그런데 혼돈의 양가적 속성을 잊으면 안되겠다고. 혼돈은 질서를 무너뜨림과 동시에 다른 방향으로의 삶을 추구하게 하는 에너지로 작용하기도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언제든 맞닥뜨릴 혼돈을 건강하게 다루려면, 혼돈에 저항하는 힘의 크기와 방향을 잘 설정해 이전보다 두터운 질서를 만들 필요가 있겠다고.
삶의 의미를 찾는 것, 정말 필요할까.
존재의 의미를 찾다보면 자주 허무에 이른다. 태어나려고 태어난 게 아닌데, 세상에 던져지듯 생을 이어가는 것에 버거움을 느낄 때가 있어서다. 그런데 그렇게에 인간은 살아가는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입장에 동의한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인간에게는 본질이 없다. 도구가 아니기에. 본질도 목적도 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단 자각하고 나면 우리에겐 어떤 가능성이 주어진다. 극단적인 허무에서 나아가 삶의 이유를 만들고자 하는 일련의 시도들, 나에 대해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나를 만들어가는 창조적 존재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삶의 의미가 꼭 필요할까.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의미가 없다면, 아무리 굴곡이 심한 날도 밋밋하게 느껴질테고 의미가 있다면, 아무리 단조로운 일상도 나름 사랑스럽게 느껴질테니까. 삶의 의미란 걸 물리적으로 볼 수 있어서, 그 크기를 가늠해볼 수 있다면. 모양을 관찰할 수 있다면. 깊이를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 의미가 흩뿌려진 위치를 알 수 있다면 좋을텐데.
안타깝게도 의미란 건 그렇게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마음을 꾸준히 열어보이고, 마음 속 이야기를 눌러적고, 그래서 활자로 모양을 달리 한 마음과 똑바로 마주하는 일 뿐이다. 뼈아픈 내 모습과도 마주하면서, 나와 가까워지는 게 성장이고 나아감이 아닐까.
인간에게 언어란 어떤 의미를 가지나.
세계를 규명하기 위한 기호, 동시에 언어적 거세를 가능케 하는 도구. 인간 외 세계의 중요성을 받탈하면서 인간이 정상의 자리에 머물기 위해 운용되는 기호. 철학사에서 언어는 한때 논리를 만들어내는 수단으로써 오류없는 정교함을 요구받았다.
논리와 언어의 오류를 수정하고 제거하는 것을 작업의 목적으로 여길 정도로. 그런데 종국에는 - 비트겐슈타인도 언어와 사고체계가 가진 한계를 인정했다. 언젠가 말할 수 없는 지점에 가닿을 수 있다고.
언어가 필요한 순간을 떠올려봤다. 일반적인 대화 상황을 제외하면, 우리가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나의 관념에만 머물러 있는 대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언어가 아니면 우리는 소통할 수 없다. 명명하지 않으면 관념에 머물면서, 불활성 상태에 있는 개념들.
하지만 이 세계를 지탱하는 여러 믿음들이 관념적인 개념과, 지각되는 개념들로 뒤엉켜있는 데다 우리가 감각적으로 경험한 대상들을 자의적으로 분류하고 구분 지으면서 언어의 오류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언어가 가진 오류에 마냥 회의적인 건 아니고 언어는 인간이 발명한 도구이기에 절대적이거나 고정적이지 않다. 오류는 계속해서 다잡아가면 될 뿐, 그뿐이다. 언어의 오류를 자각할 수만 있다면, 그간 우리가 굳게 믿고 있던 세계를 다시 혼돈에 밀어넣고, 새로운 세계를 언어라는 질서로 창조하는 것, 그 과정도 어려운 일은 아닐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