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스 로리, 기억 전달자] 불완전한 삶이 주는 기쁨

끄적끄적
우리 헌법은 모든 국민의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을 법으로 보장한다. 이 법은 이른바 ‘행복추구권’이라 불린다. 조문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구체화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헌법 제10조)
행복추구권은 국가가 개인을 통제하는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제도다. 때문에 어떤 사회에서는 이 권리를 요구하는 일이 그 자체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기도 한다. 국가의 주도 아래 철저히 통제되는 사회라면, 그 충격은 더욱 크게 다가올 것이다. 소설 <기억 전달자>는 주인공 조너스의 이야기를 통해 ‘행복’의 가치를 재고하도록 독자를 이끈다.
<기억 전달자>의 배경이 되는 마을은 규칙을 통해 체계적이고 실용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오랜 관습으로 굳어진 규칙은 결혼과 아이 배정, 직업 결정, 노후 생활 등 마을 주민의 생애 전반에 걸쳐 적용된다. 사람들 간의 존중과 신뢰가 높아 마을 내에는 어떠한 갈등도 없고, 개인의 희생을 감내할 불안정한 선택을 할 필요도 없다. 그저 절대자가 현명하고 합리적인 결정으로 내린 길을 따라 고통 없는 인생을 영위해 나갈 뿐이다. 사람들은 마을의 관습에 불만을 갖거나 선택권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 기이하고 이질적인 평화는 잘 설계된 ‘교육’에 의해 유지된다. 조너스 마을엔 몇 차례의 기념식이 있다. 그리고 각 기념식은 마을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아이들의 역량을 상징화하고 있다.
이를테면 네 살 기념식에서 받는 '등에서 단추를 잠그는 재킷'은 서로 도우며 살라는 것을 의미하며 일곱 살 기념식에서 받는 '커다란 앞 단추가 달린 재킷'은 아이의 독립을 나타내는 첫 신호를 상징한다. 열 살 기념식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는 이유는 아이들에게 성 역할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이에 맞는 기념식은 열두 살이 되어 마무리되는데, 이때 아이들은 자신의 특성과 재능에 맞는 직위를 받게 된다. 이러한 체계는 마을의 질서를 더욱 공고히 한다.
마을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기억 보유자’라는 특이한 직위 덕이다. 기억 보유자는 세계 전체의 기억과 기록을 오롯이 보존해 마을이 당착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는 사람이다. 기억 보유자가 숱한 슬픔과 고통을 스스로 보관한 덕에 마을 사람들은 큰 혼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주인공 조너스는 열두 살 기념식에서 차기 기억 보유자로 선출된다. 기억 보유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하는 과정에서 조너스는 색깔을 보게 됐고, 사랑이나 고통과 같은 감정을 얻게 됐으며, 효율과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직위 해제의 본모습까지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기억이 존재하고, 모두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삶이 더 옳다고 생각하며 임무 해제 위기에 놓인 가브리엘과 함께 마을을 떠나기로 한다.

조너스의 탈출과 기억 보유자라는 직위는 트롤리 딜레마를 연상시킨다. 트롤리 딜레마는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하는 것은 옳은가?’라는 명제를 통해 공리주의의 한계를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이 계속됨에도 실제 사회는 상당수 공리주의의 원리에 따라 운영된다는 것이다. 10여 년 전 칠레에서 33명의 광부가 구리 광산에 일시에 매몰되는 사고가 있었다.
당시 첫 구조자 아발로스는 일종의 피실험자로서 구조대가 동원한 장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시험하는 데 동원됐다고 한다. 가장 건강한 사람이 가장 큰 부담을 짊어진 셈이다. 다행히 구조 장비에는 이상이 없었고 나머지 32명도 무사히 구조될 수 있었다. 칠레 사례 외에도 우리 주변에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즉 행복의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소수의 희생을 요구하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누군가 조너스의 탈출을 밝은 마음으로 응원할 수 없었다면, 이같은 이유에서 비롯한 마음일 것이다. 기억 보유자인 조너스가 마을을 떠남과 동시에 마을에는 큰 혼란이 들이닥칠 게 뻔하다. 또 작품을 살펴보면 다른 직위와는 달리 기억 보유자에게 특권이 있다는 점도 근거로 제시할법하다.
기억 보유자는 마을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선출되며, 그 능력에는 ‘고통을 견디는 힘’도 포함돼 있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겪지 않는 고통을 느낄 때도 있지만, 인내하는 삶에는 또 다른 보상이 따랐다. 마을 사람들의 존경, 즉 기억 보유자는 일종의 사회적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늘 같은 상태’에 균열을 낸 조너스의 선택을 열렬히 지지한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라는 구호를 외치고 싶진 않다. 다만 다수의 행복과 소수의 불행이 과연 질적으로 동등한 선상에 있는가에 관해서는 한 번쯤 고민해볼 만 하다고 생각한다. 기억 보유자는 고통과 기억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괴로움을 느낀다.
한 사람을 고통과 외로움에 몰아넣고 ‘명예로운 삶’이라는 말로 정당화하는 사회가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조너스 마을은 행복에 관한 오독을 남발한 디스토피아다. 나는 <기억 전달자>에서 환희에 찬 절망을 보았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일까. 한 칼럼에서 신형철 교수는 행복을 이렇게 묘사했다. “잠에서 깨보니 나는 땀에 젖어 있고 그 상태가 불쾌하다. 가까이 있는 선풍기를 켜면 나의 상태는 바뀐다. 시원해지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오래된 선풍기 앞에서 나는 기분 좋은 믿음 하나를 갖게 된다. 아직 충분히 시원하지는 않지만, 이미 나는 ‘덥다’에서 벗어나 ‘시원하다’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으니, 문제없이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바로 그 순간,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행복은 믿음의 한 종류인데, 내가 언젠가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에 이를 것이라는 믿음이란다. 이 말을 놓고 보니 행복이 가능성의 미학에서 탄생한다는 새로운 단상이 번뜩인다.
매주 수요일이면 복권을 구매하는 친구가 있다. 당첨 이력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5,000원이 두어 번, 그리곤 거의 꽝이다. 복권을 잘 사지 않는 나는 불확실한 당첨을 기다리느니 적금을 들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 애는 뜬구름 잡는 소릴 했다. 당첨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만에 하나, 당첨될 가능성도 있지 않으냐고. 그날을 손꼽으면서 5,000원으로 행복을 산댔다.
그 애의 행복은 통제되지 않는 삶의 무수한 ‘가능성’에 뿌리를 내렸다. 우리의 삶은 예측 불가능하고, 우리는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며 매일을 살고 있다. 삶이 그저 잘 짜인 시스템 속 굴레에 그쳤다면 복권에 당첨되는 행복도, 낙첨에서 느낄 슬픔도 아무런 색을 갖지 못할 것이다. 견고하던 세계에 균열을 낸 조너스에게 무한한 응원을 보내는 이유다.
아마 조너스가 낸 균열은 새로움을 창조할 것이다. 처음엔 막대한 혼란을 동반할지언정 궁극에 이르러 반드시 완전함으로 나아갈 것이라 확신한다. 유토피아로 그려지는 조너스 마을은 절대적으로 완결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더 이상 보완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곧 어떠한 움직임도 없는 ‘정체’를 말한다. 따라서 완전한 마을에는 미래가 없고, 발전이 없으니 그 어떤 역사도 가질 수 없다.
혼란이 생성된 다음에야 조너스 마을은 완성을 위한 움직임을 행할 것이며, 곧 그 세계도 공통의 ‘역사’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나아감은 기억 보유자가 아닌 모든 마을 사람들이 함께 짊어져야 할 몫이다.
마을에서 탈출한 후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조너스의 눈앞엔 기억 전달자로부터 전달받은 기억의 장면이 펼쳐진다. 조너스가 마주한 너머의 세상은 환상적이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 ‘늘 같은 상태’와 예측이 가능한 사회를 벗어난 조너스는 결국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겠다.
다만 그런 조너스가 ‘후회’를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마을을 떠나기로 한 결심은 아무런 선택지도 없던 사회에서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 것이니까. 그리고 그 결정이 더 올바른 선택임을 확신했으니 말이다. 이 책을 읽을 많은 조너스들이 제 삶에서 행복을 추구할 권리의 감미로움을 만끽하기를, 그리하여 더 나은 삶을 쟁취하기를.